잔다르크는 공식적으로 1431년 5월 30일 19세의 나이로 영국군에 의해 이단자로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5년 뒤 자신이 처녀 잔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이 나타난다.
그녀의 주장이 거짓말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당시 잔다르크의 남동생 프티 장과 피에르는 군에 복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녀와 만나기 위해 메스로 향한다.
메스로 향한 두 형제는 잔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와 만나고 그녀가 잔다르크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다. 잔은 영국군과 싸우던 시절부터 그녀를 알고 있던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중에는 왕의 시종인 니콜로도 있었다.
다음날 형제는 그녀를 보쿨뢰르로 데리고 갔고 그녀는 그곳에서 1주일을 머물면서 7년전에 그녀를 알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동안 남동생 프티 장은 왕에게 누이 잔다르크가 아직 살아 있음을 보고했다.
왕의 반응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왕은 재무장관에게 명하여 프티 장에게 100프랑을 내렸다고 한다. 1436년 8월
9일자의 오를레앙 공식문서에는 '처녀 잔'으로부터의 편지를 가져온 시중꾼에게 시의 재정에서 배달료의 지불을 인정한 기록도 있다.
이상의 사건 기록은 잔다르크에 관한 기본적 자료로 알려진 쥘르 키셰라의 5권의 '잔다르크의 심판과 부활'(1841년)이라는
저서에 나와있다. 그 책에는 이외에도 여러가지의 자료를 수록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에는 1437년 6월 24일에 잔의 기적의
힘이 그녀에게 되돌아 갔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무렵에 그녀는 뷔르템베르크의 영주 율리히 백작의 비호자가 되었으며 그 백작은 그녀를 콜로뉴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사교구의 지위를 차지하여 두 성직자의 충돌에 말려들었다. 한 사람은 사제단으로부터 또 한 사람은 로마교황으로부터 임명받고
있었다.
율리히 백작과 잔은 유달릭이라는 인물을 편들었으나 바슬 회의는 유달릭을 침해자로 간주하고 로마교황이 지명한 자를 임명했다. 콜로뉴의 심문자는 율리히 백작의 손님에게 흥미를 가지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이 여성 손님은 마술을 행하고 남자와 댄스를 하며 여자의 조심성을 넘어서서 멋대로 먹고 마신 것이 밝혀졌다.(그녀는 테이블보를 찢었다가 그것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며 벽에 던져서 깬 유리도 그렇게 했다.)
이 조사 결과에 심문자는 충격을 받았고 그녀에게 출두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도시에서 도망쳤다.
심문자는 그녀를 파문시켰다. 아를롱으로 되돌아가 룩셈부르크 공작 부인의 저택에 있던 중 그녀는 로베르 데 자르무아르라는 귀족을
만나 결혼했다.
이것에는 그녀의 지지자들도 틀림없이 놀랐을 것이다(전의 잔다르크는 동레미의 '요정의 나무' 아래서 영원한 순결을 맹세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로베르의 집이 있는 메스로 이사해서 3년간 아이 둘을 낳았다. 1439년의 여름 '데 자르무아르 부인'은
투르로 가서 투렌의 집정관인 기욤 벨리에를 통해 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지방의 집정관은 10년 전에 '처녀'를 손님으로 대접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시 그후 그녀는 푸아투로 가는데
그곳에서는 만이라는 지방의 명목상의 지배권이 주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에 그녀가 즉위를 가능케했던 왕으로부터라고 생각된다.
다음에 왕은 이 지배권을 잔의 전쟁터의 친구인 쥘 드 레에게 준다.
사디스트로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이 인물은 파리의 성벽앞에서 잔과 함께 싸운 이후로 흑마술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바닥이
난 개인의 재산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뒤에는 아이들의 사디스틱한 살인자로 변신했다. 다음 해인 1440년 쥘 드
레는 재판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 시체는 소각되었다.
한편 데 자르무아르 부인과 만났을 때(이 가능성은 높다. 그녀는 그에게 토지의 지배권을 양도할 의무가 있다.), 그는 그녀를 옛날의 전우로 대접했다고 한다. 그는 중기병장의 칭호를 그녀에게 양도하고 있다.
1440년 잔은 파리에 가서 왕을 만났으나 왕은 그녀를 가짜라고 단정한다. 그녀를 만난 후 왕은 그녀를 가짜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단정 또한 만난 후였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가 가짜라고 판단되었다면 왕은 그 자리에서
그것을 지적했을 것이다.
왕은 11년 전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속임수를 이번에도 사용했다. 시종 한 사람이 왕으로 가장했고 왕은 시종의 한
사람으로 가장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그녀는 속지 않았고 왕은 '처녀여, 그대는 신의 이름으로 환영받으리라'하고 말했다. 이런
장면이 연출된 후에 왕은 그녀가 가짜라고 단정한 것이다.
'파리시민보'라는 당시의 신문에 따르면 그후 그녀는 체포되어 심판을 받고 악인이라 하여 대중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그녀는
대중앞에 자신의 거짓을 고백했다고 한다. '파리시민보'는 이 기사로 그녀가 처녀 잔다르크의 흉내를 내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해괴망측하다고 해야만 한다. 우선 첫째로 그녀는 그후 메스로 돌아가서 지금까지처럼 변함없이 '처녀
잔'으로 통하고 있었다. 1443년에는 남동생 피에르가 탄원서에서 '처녀 잔, 나의 누이'라고 그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또
사촌 오빠인 앙리 드 불통도 프티 장, 피에르와 그 누이인 처녀 잔이 세르메즈 마을에 가끔와서 친척들의 파티에 참가했으며 모두가
그녀를 잔으로서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이 그녀를 가짜라고 단정했고 그녀도 대중에게 이를 고백했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증거가 '파리시민보'뿐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이런 공개적 스캔들의 장본인이었다면 이것은 분명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처형 전에 '파리의 시민'이 잔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할 수 있다.
아나톨 프랑스는 잔다르크가 살아 있어서 파리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파리의 일반시민은 흥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파리 대학은 마녀라고 선고받은 잔다르크에 대하여 아주 냉담했다.
그 선고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로마교황 뿐인데 잔의 명예회복을 지향하는 추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측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파리의 왕실 주변 관리와 치안 관계자에게 있어서 잔다르크의 출현은 곤혹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교회
내부에서 처녀 잔의 무죄를 위해 동분서주(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1456년이며 잔다르크가 최종적으로 성자의 서열에 오른 것은
1922년)하고 있던 그룹에게는 그 장본인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게다가 결혼까지 하고 돌아온 것은 그들의 영웅적 캠페인에 대한
장애 요인밖에 될 수가 없으며 이야기의 줄거리를 망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잔을 가짜라고 단정해야만 하는 사회적 압력이 왕에게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왕실 안의 지혜있는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정치적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왕이 그녀를 진짜라고 단정하면 그것은 '절대'가 된다. 프랑스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신원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않는다.
이로 인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이 일어난다. 공적인 인지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한편 왕이 그녀의 신원에
대하여 의문을 표명하면 불편한 사태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는 집안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것으로 모두에게 다 좋은 일인
것이다." 현실로 일어난 것은 바로 이 줄거리대로였다.
아나톨 프랑스는 데 자르무아르 부인을 잔다르크를 사칭하는 자라고 생각했으나 그렇다면 왜 '처녀 잔'을 알고 있던 많은 사람이 데 자르무아르 부인을 진짜라고 인정했을까?
그녀의 두 남동생은 유명한 누이가 살아 있는 것으로 하면 득이 되므로 데 자르무아르 부인의 이름 사칭을 묵인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옛 전쟁터의 많은 동료가 그녀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이 가설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잔다르크는 유달리 설득력이 강한 여성이었다. 앞에서 말한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와 왕위를 계승한 황태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그녀를 처음에는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후에는 신의 음성에 이끌린 여인이라고 믿게 되었다. 재판에서도 그녀는 성
캐더린께서 분부하는대로 대답한다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법원에서까지 몇 사람이 그녀의 편을 들었다. 로이셀뢰르라는 성직자는 그녀의 변호인역을 맡았고 잔이 두명의 간수의 태도를
불평하자 영국군의 수령 워윅 백작은 몹시 화를 내면서 당장 간수를 교체시켰다. 이것은 그가 잔을 존경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상의 증거를 종합해 볼 때 그녀를 구출하려는 음모가 성공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욱이 영국측이 이 계획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있다. 잔다르크가 로렌에서 화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은 800명의 영국병사에 의해 상당한 거리로 밀려났다. 처형당하는
여인이 누군지 알 수 없게 하려는 조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1456년, 그녀의 명예회복 재판에는 사형집행인의 확인서가 제출되었는데 조작된 것이었다. 처형때에 잔다르크를 최후까지
지켜보았다는 잔의 세명의 동료 라브뉘, 마쉬, 이잠바르가 출두했는데 잔다르크가 구출되었다고 하면 이 세사람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명예회복에는 사실 판단에 허술한 측면도 있었다.
그 재판은 1450년에 시작되었는데 재판을 시작한 것은 잔다르크의 어머니이며 동생 피에르가 돕고 있다. 잔의 어머니가 데
자르무아르 부인을 자기 딸이라고 인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사칭이라고 책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간접적으로
이것을 인정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편 어머니와 피에르는 잔이 1431년에 영국군에 의해 처형된 것을 전제로 하여 재판을 신청하고 있다. 이것이 눈감고 아웅하는 그럴듯한 수법인 것이다. 결국 이 명예회복극의 목적은 돈이었다. 잔다르크는 부자였다.
구국 영웅에 대하여 왕은 충분하게 보답했다. 그러나 잔이 가톨릭 사회에서 파문당하고 있는 한 그 재산은 모두 동결된 채
있을 수밖에 없다. 가족들이 잔의 명예를 회복시켜야만 할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과연 잔다르크는 어떻게 된 것일까? |